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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with 'Jim Avignon'




“나는 나의 그림을 통해 베를린에서

일어나는 주요한 주제들에 대해

발언하고자 한다. 여러 언론 매체는

나와 나의 그림에 대해 도시와 사회의

문제점을 예술로써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나는 그림 속 이야기꾼이자

스토리텔러다.”


Jim Avignon




짐 아비뇽 격동의 베를린 예술 역사와 함께 변화해온 그는 25년간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언더그라운드와

서브컬처를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보헤미안인 그는 페인터, 뮤지션, 큐레이터, 퍼포머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파트너 관계로 바라보고 있으며, 도시 곳곳에서 그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의 베를린, 1990년대의 모험과 실험의 베를린, 2000년대 초반

자본주의가 점령한 베를린, 그리고 완전하지 않은 채로 완벽한 지금의 베를린까지. 페인터이자 뮤지션, 큐레이터,

퍼포머, 보헤미안인 짐 아비뇽이 그린 그림들에는 25년간 그가 바라본 그때의 베를린이 담겨 있다.





청년 시절 갖게 된 그의 차, 오래된 아우디 100.

그는 자신의 차가 그 당시 즐겨 들었던 뉴웨이브 음악처럼

보이길 원해 분홍색과 검은색으로 새롭게 꾸몄다.




1988년부터 2005년, 그리고 2012년부터 2018년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

다. 당신의 예술과 삶에 25년 동안의 베를린 역사의 흐름이 깃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1년 전인 1988년 뮌헨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그 후 25년간 베를린은 나의

예술 작업 파트너로서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다. 페인터, 뮤지션, 큐레이터, 퍼포머 그리고 보헤미안인 

는 세계 여러 도시에서 작업을 해왔다. 그중 예술 활동의 기반이 된 베를린에서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뿐 아니라

기획을 통해 이 도시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당신이 처음 만난 베를린에 대한 인상이 궁금하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전과 후의 베를린 분위기는 어땠나?

장벽이 무너지고 난 직후인 1990년대 베를린은 누구에게나 모든 것이 가능한 모험과 실험의 도시였다.

모두가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였고, 누구든 아티스트일 수 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내게는 마치 커다란 놀이동산과 같았다.


2005년에 베를린을 떠났고, 2012년에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베를린을 떠난 특별한 계기가 있나?

1990년대 베를린에서는 누구도 많은 돈을 버는 것에 관심이나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생활비는 물론

집세도 아주 저렴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베를린은 모든 것이 가능했던 모험과 창조의 도시에서 대기업의

미를 끄는 도시로 변하기 시작했다. 레코드 및 음반 회사, 스타트업들이 돈을 벌고자 베를린으로 왔다. 도시를

 만드는 요소들의 우선순위가 바뀌며 예술은 말 그대로 뒷전이 됐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1990년대의 내 존재는

2000년대에 들어서며 많은 사람에게 잊혀가는 듯했고, 나는 마치 1990년대의 멸종된 공룡과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오래된 연인처럼 느껴졌다. 말하자면 나의 파트너가 갑자기 자본에 관심을 두고

 나를 지루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고 할까. 본능적으로 나를 새롭게 규정하려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베를린에 이주한 지 18년째 되던 해였다. 휴식기를 갖기 위해 떠난 곳은 뉴욕의 브루클린이었다.

 하지만2005년부터 2012년까지 브루클린에 살며 베를린과 접촉을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쌓인 피로감을 안고 2005년 뉴욕의 브루클린으로 떠났다.

베를린을 떠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베를린이 지루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베를린과 떨어져 7년간 뉴욕에서 생활하며 나의 인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뉴욕에서 처음으로 대도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대도시를 움직이게 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리고 떠나온 베를린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내가 떠나 있던 7년 동안 베를린은 많이 변했고, 나 또한 그 세월만큼 변했다. 수천 명의 새로운 외국인이 베를린에서

 자신만의 작업 활동을 열심히 펼쳤고, 뉴욕에 살던 많은 친구 또한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베를린에 다시 새로운 중심이

 생겼다는느낌을 받았다.


다시 찾은 2012년의 베를린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나?

돌아와 마주한 베를린은 확실히 새로운 매력을 품고 있었다. 2012년의 베를린은 하나의 도시로서 아주

강한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그들이 지닌 재능과 힘으로 베를린은 다시

강한도시로 거듭났다. 현재의 베를린은 2000년대 베를린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90년대 베를린과

닮았다. 독일에서 가장 특이한 도시이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도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1990년대에 베를린 거리 곳곳을 스트리트 아트로 물들인

짐 아비뇽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반항기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다.





1992년 그는 친구들과 함께 독일의 중부 도시 카셀에서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 행사 '카셀 도큐멘타'에

참여해 3주 동안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을 거리 한가운데에

전시했다. 마치 갤러리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페인터, 뮤지션, 큐레이터, 퍼포머는 당신을 대표하는 단어다. 여러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페인터 짐 아비뇽을 소개해달라.

1990년 초반부터 베를린 곳곳의 수많은 클럽에서 그림을 그렸다. 많은 사람에게 나는 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와 서브컬처subculture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1990년대 베를린 내 모든 클럽의 문화를

 그림에 담았고, 당시 사회의 문젯거리이던 클럽, 파티, 마약이 주제가 됐다. 나는 내 그림을 통해 베를린에서

 일어나는 주요한 주제에 대해 발언하고자 했다. 여러 언론 매체는 나와 나의 그림에 대해 도시와 사회의 문제점을

예술로써 이야기한다고 표현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림 속 이야기꾼이었고, 스토리텔러였다.


지난 5월 포르투갈 아티스트 ‘곤살루 마르Gonçalo Mar’와 함께 암스테르담의 한 클럽 건물에 벽화를 그렸다.

 2014년 베를린의 갤러리 ‘크리스탈 발Crystal Ball’에서는 아티스트 ‘카티 케펠Kathi Käppel’과 함께 전시를 열었다.

른 작가와의 협업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

그림에 관해 여러 기획을 시도해왔다. 특히 커뮤니티를 통해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항상 이 도시에서 가능한 모든 방향의 통합을 시도하고자 한다. 개인 작업은 자아실현에 더 가깝고,

 공동 작업은 모든 작업의 방향이 파트너에게 열려 있다. 나의 자질과 결과물을 다른 아티스트와

결합하는 방법은 늘 새로운 경험이자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1990년에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캔버스인 ‘이스트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에 그림을 그렸다.

이곳에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989년 막 베를린장벽이 허물어졌을 때, 이 장벽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모든 사람이 참가하는

예술 프로젝트가 있었다.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참가하게 됐다. 초창기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1~2년 사이 어느새 베를린의 대표 명소로 자리 잡았다. 베를린장벽은 대부분 철거되었지만 이곳만큼은

역사성과 예술성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존되었다. 세월이 흘러 장벽에 그린 그림들이 훼손되기 시작했고,

베를린시는 복원 작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복원 작업에 이해할 수 없는 규정이 포함됐다. 이를테면 장벽의 그림

을 복원하되 일절 수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프로젝트에 참가한 아티스트들은 작가의 예술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에, 나를 포함한 아티스트들은 이러한 규정에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맞서 대항하기도 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이후 그야말로 베를린 거리 곳곳은 전 세계 예술가들의 캔버스가 됐다.

베를린 예술을 이야기할 때 스트리트 아트는 빠질 수 없다. 하지만 현재 베를린시에서 그라피티는 불법행위이기도 하다.

런데도 그라피티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베를린을 다양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자유의 도시 베를린에서

그라피티를 제한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역사성과 예술성을 지닌 벽화이자 기념물 같은 곳이다. 그렇기에 이곳의 그림

들은 보호받고 있다. 이곳의 벽화와 달리 그라피티는 더욱 자유로운 예술 행위로, 베를린 거리 곳곳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다. 물론 그라피티는 법적으로 금지되어있지만, 오래전부터 베를린을 물들인

예술 행위로서 암묵적으로 간주하고 있기에 엄격하게 제재하지는 않는다.





그의 집은 공간마다 그가 그려온 그림들로 가득했다.

거실은 그가 언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업 공간이다.





예술은 여전히 장벽이 높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린 현대에서 당신은 ‘저가 예술 운동Cheap Art Movement’을

이끌고 있다. “1,000달러에 한 장의 이미지를 파는 것보다 1달러에 1,000장의 이미지를 팔고 싶다”라는

당신의 말이 인상적이다. 낮은 가격에 예술 작품을 생산해 대중화하는 데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예술은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이다. 예술 시장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소수의 사람들 손에 좌지우지되

거나, 소수를 위한 놀이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예술 작품을 소유하거나 즐기는 대부분의 사람은,

작품을 접하기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을 세계를 알게 된다. 그들을 위해 새로운 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데 보람을

낀다. 나의 작품을 모두가 오고 가며 볼 수 있는 벽에 새김으로써 그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실이 창작 활동을 더 즐겁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예술 작품을 빠르게 생산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여러 예술 활동 중에서도 특히 그림을 그릴 때 빠르게 작업하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기 전까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이미지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사이즈가 큰 그림을 빠른

간 안에 그리는 일은 때로 내게 에너지를 불어넣어준다.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이자 스타일인 것이다.

오랜 시간 생각하고 고심해서 그린 그림보다 직관에 따라 빠르게 그리는 그림은 형태, 모양, 색에 대해 명확히 이해

하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문제부터 인간관계까지 삶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작품의 소재이자 주제가 되는 당신에게 요즘

가장 흥미를 끄는 이슈가 있다면 무엇인가? 혹은 당신을 갈등하게 하는 이슈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그림을 그릴 때 사회문제를 재미있게 표현하고자 한다. 늘 현재 그 도시와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거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다. 최근 들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진보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다.

스마트폰,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등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들이 현대 과학기술을 통해 최신 정보를 얻고자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보고 있으면 그 자체로 흥미롭다.


당신의 솔로 뮤직 프로젝트이자 두 번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네오안진Neoangin’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이름으로 어떻게 활동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네오안진은 감기에 걸리거나 목소리에 문제가 있을 때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크고 달콤한 빨간색 알약

이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나는 테크노 클럽에서 유일하게 그 어떤 약도 하지 않았기에 클럽 사람들에게

이 약을 건네기 위해 늘 가지고 다닌 기억이 있다. 이 이름으로 솔로 뮤직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는

그림 그리는 일에 스스로 문제를 느꼈고, 완전히 다른 분야의 예술 활동에 관심을 두게 된 시기였다.

이 프로젝트가 결코 장기 프로젝트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 이름으로

 열다섯 장의 앨범을 냈고 거의 세계 모든 곳에서 연주하고 있다.


예술 활동뿐 아니라 2016년에 난민 캠프 아이들과 함께 일했다는 인터뷰를 보았다. 지금 한국은 예멘

난민을 수용하는 문제와 관련해 찬반 논란이 뜨겁다. 난민 수용에 대한 사견이 궁금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믿는다. 나의 삶을 돌보는 동시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서 중요한 것들을 잃고 있다는 현상을 인지하지 않고서는 온전하고도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교적 사회적 환경이 좋은, 삶의 질이 높은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는 인류의 문제가 한 나라의 국경에서 끝나지 않을것이다. 공동체 사회를 넘어, 세계 여러 나라가

이견을 조율하고 함께 잘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1990년 세상에서 가장 큰 야외 갤러리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 그린 짐 아비뇽의 그림.

당시 사회 모습을 풍자적으로 담았다.





그의 집 곳곳에서는 오랫동안 사용한

물감, 붓 등 다양한 그림 도구를 발견할 수 있다.



베를린은 현재 가장 ‘힙hip’하다고 꼽히는 곳 중 하나로 세계 각지에서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든다.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로서, 또 이런 움직임을 오랜 시간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젊은 예술가들은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과거의 예술가들과 다른 방식으로 작업해나가기 위한 자신만의

신념과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진부하고 고루한 예술가들의 방식을 무조건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를 바란다.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무엇이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가?

내 삶의 면면에 대한 호기심이 원동력이다. 그것들에 대해 알고 싶고, 어떻게 생겼으며, 또 어떻게 작동

하는지 알고 싶어서 작업한다. 비록 내 프로젝트 중 일부가 완전히 틀렸거나 오류가 있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아름다워서 좋다.


당신에게 예술은 무엇인가? 당신의 예술 작품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기를 바라나?

내게 예술은 의사소통을 하는 도구이다. 예술을 통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 예술이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하겠다.


앞으로 구상 중인 작품 또는 계획하는 활동이 있다면 들려달라.

2018년 9월에 베를린에서 〈The Remains of the Night〉라는 큰 전시회를 열 예정이라 준비 중이다.

이후 11월에 프랑크푸르트의 한 박물관에서 쇼를 진행할 계획이다.


예술의 캔버스가 되는 베를린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도시인가?

베를린은 내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아주 와일드한 파티라고 할 수 있다. 내게 현재 진행형인

베를린은 완전하지 않을 때 완벽한 도시다.


베를린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소 중 당신만의 아지트가 있나?

템펠호프 펠트Tempelhof Feld는 1923년에 개항한 옛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을 공원으로 조성해 사용하고

는 곳이다. 시민들은 드넓은 활주로와 잔디밭에서 각자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한다.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누가 무엇을 하는지 한눈에는 알 수 없는 이 공원의 풍경이 내가 생각하는 베를린의 전형적인 아름다운

모습이다. 전통적인 아름다움이라기보다, 자유로워서 각자 자신의 모습 그대로 채워나갈 수 있는 아름다움 말이다.

마무리되지 않고, 뭔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듯한, 완전하지 않은 베를린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내가 이곳의 빅 팬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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