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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with '에이에이 브로손'






AA Bronson


 Life of Art Artist 




캐나다 밴쿠버 출신의 1946년생 에이에이 브론슨이 살아온 72년의 삶은 예술이다.

 시대를 앞선 예술의 궤적을 그려온 에이에이 브론슨. 최초의 비주얼 매거진을 창간하기도 한

 그의 예술은 아트북·교육·성·영성·의학 등 다양한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삶의 모든 것이 예술인

 그에게는 무엇보다 늘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과 예술가들이 언제나 함께한다. 


베를린으로 주거지를 옮기기 오래전, 에이에이 브론슨AA Bronson은 유년 시절을 캐나다 전역의 여러 도시에서 보냈다.

 그 의 아버지는 국군 장교였고, 그와 가족은 자주 이사했다. 결속 과 공동체가 부재한 환경 속에서 자란 그에게 책은 유일하고도

가장 친한 친구이자, 새로운 세계를 향한 문이었으며, 현재 그가 펼치는 다양한 예술 활동 영역의 초석을 다진 동기였다.

결속과 공동체는 그의 예술관인 동시에 예술 활동 전반을 아우르는 정신이다. 이를 증명하듯 그의 첫 공식적인 예술 활동이자 

52년이라는 아티스트 경력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제너럴 아이디어General Idea’에서 그는 역시 혼자가 아니었다.


 25년의 시간을 함께 보낸 두 친구 펠릭스 파츠Felix Partz와 호르헤 존탈Jorge Zontal이 있었다. 기존의 사회구조에 반기를 드는 예술 활동 집단 제너럴

 아이디어를 설립하기 전, 그는 1960년대에 캐나다 매니토바 대학교The University of Manitoba 건축과에 입학해 펠릭스 파츠를 만났다.

 그는 그 곳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 이론과 급진적인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폐쇄 적인 학교의 교육과 보수적인 언론의 한계를 실감하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다니던 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1960년대 후반, 그는 리자이나 대학 The University of Regina의 심리학자와 함께 일하면서 지역사회와

 협동조합을 위한 그룹 과정의 조력자로 훈련받았다. 그리고 그는 이 과정에서 호르헤 존 탈을 만났다. 

 















제너럴 아이디어의 아티스트를 위한 최초의 비주얼 잡지

<파일>의 1983년도 표지. 주제는 'Special General Idea Issue-Mondo Cane Kama Sutra' 였다.






2013년도에 이어 2018년도에 에이에이 브론슨은 그의 어시스턴트

 리처드 존 존스와 '치유를 위한 텐트' 작업의 일환으로 방문객들을 맞았다.


에이에이 브론슨, 펠릭스 파츠, 그리고 호르헤 존탈이 1969년 공동 설립한 제너럴 아이디어는 토론토에 기반을 두었다.

 그 들은 시간이 흐르며 때때로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25년이라 는 시간의 대부분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했다.

 친구들과의 동거는 공동체 생활에 철학적 관심을 두고 공동체 운동을 펼치기도 했던 그에게 그 자체로 의미있는 예술 생활이자 일상이었다.

 그들은 제너럴 아이디어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매체에서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예술 활동을 하며 예술의 영역과 가능성을 넓혀갔다.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최초의 자서전 형식 비주얼 아트 매거진 〈파일File〉을 창간 및 발행하고, 1974년부터 1998년까지 국제적인 출판사이자

 배급사인 ‘아트 메트로폴Art Metropole’을 설립해 분야를 막론한 예술가 친구들의 작품과 선구적인 비디오 및 공연 등을 유통하는데 앞장섰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함께 수많은 에이즈 활동가의 작품을 만들고, 여러 매체를 만들어냈다.

 

에이에이 브론슨은 SNS에 자신을 아티스트이자 힐러로 소개한다. 예술가이자 치유가라는 것이다. 25년간 함께했던

 에이에이 브론슨, 펠릭스 파르츠, 호르헤 존탈은 1994년 펠릭스 파츠와 호르헤 존탈이 죽기 전 마지막까지 토론토와 뉴욕을 오가며 함께 살았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에이즈로 죽은 후, 그는 혼자 남아 본격적으로 동성애와 영성, 의학과 치유에 예술 활동을 접목했다.

 친구들의 죽음과 상실로부터 동성애와 게이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고, 에이즈와 질병, 그리고 의학에 관해 연구하며 본격적인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산파가 되기를 바랐다. 에이즈 관련 질병에 대처하는 친구들을 돌보며 캘리포니아에서

 관련 학회와 세미나에 참여했고, 2003년에는 파리의 미술관에서 예술적인 연기로서 자신의 치료법을 처음으로 단독 전시했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잃은 슬픔과 상처가 예술을 통해 창조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그는 치유가로 활동하는 한편, 2005년 아트 메트로폴을 토대로 한 뉴욕의 ‘프린티드 매터Printed Matter’에서 이사로 일했다.

 뉴욕 아트북 페어를 설립하며 젊은 세대의 예술가 네트워크를 접했고, 그의 두 번째이자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하는데 새로운 예술가

 네트워크를 쌓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퀴어queer 컬래 버레이션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2009년에는 신학대학의 석사로 입학해

 ‘예술종교사회정의연구소’를 공동 설립했다. 


영성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오랜 관심 대상이었다. 그는 인간의 정신과 인간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감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솔로 작품과 협력 작품에 투영해오고 있다. 그에게 관심 주제인 인간 문화의 다양성을 풀어가는데 베를린만한 도시는 없었다.

 그는 2013년 ‘독일학술교류처Deutscher Akademischer Austasuschdienst, DAAD’의 초대로 1년간 처음 베를린에 거주하게 됐다.

 초대된 아티스트 중 약 절반이 베를린에 계속 남았고, 그는 베를린에 남은 아티스트 중 한명으로 6년째 이곳에 살고 있다. 

베를린 예술 시장은 그가 있었던 어느 도시보다 개방적이었 고, 베를린 사람들은 보장된 자유 속에서 서로 결속된 예술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다양한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베를린은 그에게 완벽한 도시였다. 그가 유년 시절부터 꿈꿔왔던 무정부 사상, 반체제 인사,

 오랜 역사를 이어 오고 있는 연극과 활동주의. 오늘날의 베를린은 정치적 참여 와 예술 활동이 모두 함께 어우러지고,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곳으로

 그에게 끊임없는 자극을 주고 있다. 그는 베를린의 ‘에스터 시퍼 갤러리Esther Schipper Gallery’ 대표 아티스트로 퀴어 컬래 버레이션은 물론,

 영성에 관한 예술 작품을 전시해오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해온 그의 예술은 늘 그의 삶과 그 주변으로부터 영향받아 왔다. 오래전부터 그래왔듯, 여전히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그의 생각은 이곳 베를린에서

 예술 작품을 통해 거침없이 표출되고 있다. 현재 그의 작품에 줄곧 등장하는 원시적 남성의 벌거벗은 육체는 하나의 행위 예술로서 그가 고찰하는

 성과 영성에 맞닿아 있다. 그의 예술은 늘 생활이라는 삶의 수면 위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들에 기울었다. 예술이 생활 영역의 밖과 같은 비주류를

 다룬다고 치부한다면 그를 통해 예술 그리고 예술의 범위는 새롭게 정의된다. 턱을 가득 덮은 흰 수염과 검은 뿔테 안경, 고운 그의 주름 너머로

 가늠할 수 없는, 72년이라는 예술의 삶을 잠시 가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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