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RAND

NAU MAGAZINE 3 Columm '르네상스 베를린'





◇◆◇





예술,

베를린을 기억하는 법 




도시를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도시를 대표하는 음식을 먹었을 때

 그 음식의 맛을 잊지 못한다면 맛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이고,

필요 이상의 친절을 경험했을 때 인심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베를린의 잊지 못할 풍경은 거리와 도시를 가득 채운 예술이었다.


베를린의 행정 구분은 12구, 95지구로 나뉜다. 그중 미테Mitte 지구는 베를린 한가운데에 위치한 지역이며,

실제로 '미테'는 '중심부center'를 뜻하는 독일어다. 미테는 분단 시절 동베를린에 속했던 지역으로,

분단과 통일의 몸살을 딛고 일어선 모든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곳이다.

미테의 거리를 걷다 보면 오랜 시간을 간직한 건물들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걷다 보면 이 거리를 채운, 오랜 시간을 간직한 건물들의 유리창 안으로 그림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작품을 계속 만날 수 있다. 도시 위로 오랜 시간과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에

대한 감흥보다 이 거리가 온통 예술이라는 점에 속도를 낮춰 천천히 걷고 싶어진다. 물론 미테뿐만이 아니다.


천연자원이 거의없는, 사람이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자원인 독일 베를린은 두 차례의 전쟁과 분단

그리고 갑작스러운 통일을 겪었다. 28년이라는 분단의 시간 동안 베를린 장벽만 세워진 게 아니라 

옛 동독과 서독 그리고 옛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정치·환경·사회·문화에도 벽이 세워졌고,

경제적으로도 큰 차이가 벌어졌다. 통일 직후의 혼란은 상대적으로 서베를린보다 동베를린이 더 컸다.

동베를린 시민들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한 미국·영국·프랑스 세 서구 연합국이 점령했던

서베를린으로 떠났고, 동베를린에는 주인을 잃은 집과 공장들만 남았다.

그러나 유럽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이곳, 폐허가 된 동베를린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재가 되어 무너진 도시 베를린이 예술을 중심으로 일어서기 시작한 순간이다.


폐허가 된 동베를린에 모여든 예술가들은 '타헬레스tacheles'라는 예술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들은 1907년 백화점 용도로 지은 건물을 무단 점거하고 각자 예술 활동을 펼쳤다.

타헬레스란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를 명확하게 말한다'라는 의미의 유대인 말로,

그들은 자신들이 점거한 곳에서 사회의 체제와 규제에 강력히 저항했다.

건물 내벽과 복도, 외벽을 넘어 동베를린의 폐허가 된 공유지에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정치적 구호를 표출했다. 그러나 베를린시는 곧 폐건물을 헐고 새롭게 짓고자 예술가들에게

강제 퇴거를 명령했고, 예술가들은 버텼다. 오랜 협상 끝에 이곳을 창작인 지원센터로

설립한다는 데 합의하고, 타헬레스의 예술가들은 저렴한 임대료를 내며 합법적으로

창작인 지원센터에 작업실을 얻었다. 100년이 넘은 이 건물은 안전 문제 등으로 결국 철거됐지만, 

타헬레스는 다른 구역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독일은 통일 이후 기존의 제조업 기반 산업구조는 

쇠퇴하고, 막대한 통일 비용의 후유증과 실업률 급증으로 경제가 한없이 침체했다.

각종 정비 사업과 개발 사업이 추진되었으나, 도시는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힘을 잃어갔다.

1990년대 초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서 20년 새에 베를린은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그리고 그 성장의 주역에 타헬레스와 같은 예술가와 예술이 있었다.


폐건물을 무단으로 점거해 그곳을 자신들의 작업실이자 예술 활동의 기반으로 삼는 행위를 '스쾃squat'

이라고 일컫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최초의 공식적 예술가 무단 점거 집단인 타헬레스 이후,

혼란의 시기를 틈타 세계 각지에서 온 예술가들이 베를린의 비어 있는 곳곳을 차지하며 다양한 작업과

실험을 통해 그들만의 예술 활동으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규제가 미약하던 시기 덕분에 예술가들은

자유롭게 예술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으며, 그들의 창의적 사고와 예술적 기질은 베를린 위로 끊임없이 발산됐다.

베를린 또한 이전에는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던 곳으로 변화해갔다.





세계적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설계한 유대인 박물관.

1933년에 설립됐으나 나치스에 의해 1938년 폐쇄된 후,

오랜 건축 기간을 거쳐 2001년 9월 11일 정식으로 개관했다.


베를린이 현재 예술의 도시이자 유네스코가 선정한 디자인의 도시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예술가뿐 아니라 자유와 포용의 정신으로 문화 예술의 영역을 존중의 시선으로 바라본 베를린시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2001년부터 2014년까지 베를린 시장이었던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는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하다 berlin ist arm, aber sexy'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베를린을 세계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베를린은 현재 3개의 오페라하우스, 50여 개의 연극 극장, 175개의 박물관과 미술관,

600여 곳에 이르는 사설 갤러리, 세계 각국에서 온 예술가들이 머물 수 있는 30여 개의 레지던스, 세계 최고 수준의 dj가

모여드는 클럽, 130여 개의 극장을 가지고 있으며, 해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를 비롯해 1,500여 개의

문화 행사와 축제가 열린다. 베를린 인구 약 350만 명 중 20%에 달하는 70만 명 이상의 인구가 문화, 예술 분야에

종사한다. 베를린 시민 5명 가운데 1명은 창의성과 예술성을 추구하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베를린의 산업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다.


그라운드 제로였던 베를린이 예술을 중심으로 부활한 데는 자유와 다양성을 포용한 베를린의 놀라운 회복 탄력성과 정신에 있다.

베를린의 예술은 그 어느 곳의 예술과 같으면서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역사적·물리적인 하나의 사건이라면,

예술을 통해 이념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예술의 문턱이 낮아진 것은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그 의미가 깊다.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은 자유 예술 속에서 베를린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도시로 재탄생했다.

우리가 베를린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