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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U MAGAZINE 'The Renaissance of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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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naissance of Berlin


베를린은 계속 변화하면서도 영속성을 지닌 도시다.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역사적·환경적·사회 문제적 배경으로

엮인 금빛 실들이 탄탄히 매듭을 이어왔다.

이곳의 많은 예술가는 옛 규칙을 깨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가며 자신들만의 예술 양식을 만들어가고 있다.






베를린은 건립 이후, 또는 적어도 특별함과 무게를 지닌 도시가 된 이후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도시다.

18세기 독일은 유럽의 작은 국가였던 프로이센 왕국으로, 이웃 국가와 전쟁을 거듭하며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국왕은 프랑스의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 중 몇몇 주요 인사와 서신을

교환했으며, 예술 애호가로서 수도 베를린에 시민을 위한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하기도 했다.

그게 바로 운터덴린덴 거리에 위치한 국립 오페라하우스다. 운터덴린덴은 당시 신생국으로 국토를 확장하려는

야망에 차 있던 프로이센 프랑스 파리나 오스트리아 빈 같은 강력한 도시들과 경쟁하기 위해 건축적

균형추로 조성했다. 당시 유럽 각구에서 일던 르네상스는 독일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 결과 운터덴린덴은 브란덴부르크 문 에서 박물관섬까지 이어지는 거리로, 현재 수많은 방문객이 이곳을 찾는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베를린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현대미술과 음악 때문이다.

특히 클럽 음악은 세계인을 베를린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현지인, 베를린에 거주하는 외국인 그리고 방문객은

'베르크하인' 같은 테크노 클럽에서 금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춤을 추기 위해 몇백 미터씩 줄을 선다.

베를린의 테크노 클럽은 1990년대 초반과 심지어 1920년대에 근원을 둔 베를린의 이미지를 통해 세계에 투사하고 있다.

1961년 부터 28년간 베를린을 동서로 나눈 베를린장벽이 1989년 붕괴되면서 냉전은 종식되었고 베를린은

문학적 중심지로도 세롭게 발돋움했다.





동시에 자칭 사회주의 성향의 '독일민주당'이 몰락하면서 제2의 르네상스라 불릴 정도로 전례 없이

놀라운 시대가 도래했다. 현재 베를린 중심부인 미테지구는 옛 동독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호기심이

넘치는 옛 서독의 예술가들과 기태 문화 활동가들이 활개를 치면서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서 이들은 독일민주당의 몰락을 이끈 시위가 일어난 옛 동독의 거리와 마주했다.


기업가들은 동독 정부 시절의 비어 있는 많은 고택을 현대식으로 개조했다.

1980년대 옛 서독에서 빈집 점유 문화에 대해 교육받은 활동가들이 동독 경찰의 저지 없이 거리를

활보하며 비어 있는 집과 아파트를 점유했다. 빈 상점은 예술가들의 스튜디오나 쇼룸으로 빠르게

변모했고, 지하실에는 음향 시스템과 냉장고가 들어서며 멋진 클럽으로 바뀌었다.

베를린에게 1990년은 독특한 무정부주의적 정신과 끝없는 가능성이 뒤덮은 한 해였다.


'베를린 비엔날레'의 본거지이자 오늘날까지 중요한 자유 예술 기관 중 하나인 '쿤스트 베르케'가 

아우구스트 거리에 등장했다. 라히프치히의 오래된 은행 건물에는 테크노 클럽 '트레조어'가 

들어섰고, 곧 수많은 예술 공간, 갤러리, 클럽, 카페, 레스토랑이 속속 등장했다.

얼마 되지않아 옛 서독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갤러리들도 미테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테크노 음악 축제 '러브 퍼레이드'는 매년 베를린 거리를 누비며 젊고 창조적이며

즐거운 도시의 이미지를 널리 퍼트리면서 전 세계에 많은 젊은이를 불러 모았다.

오늘날 많은 이에게 매력적인 도시로 각인된 베를린의 문화적 이미지는 1990년대에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1990년대는 이제 끝났다. 빈집을 점거하던 무리는 사라졌고, 임대료는 인상되었으며, 

예술 공간은 보다 전문화되었다. 전문적인 신진 기업들이 베를린에 등장하면서 기존의

지표를 변화시켰다. 1990년대에는 문화 인사 다수가 안정된 직장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기에

다양한 실험을 통해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목요일 늦은 밤에 문을 열어 그다음 주 화요일이나 수요일 정오까지 영업하는 클럽도 있엇다.

현재 대부분의 베를린 사람들은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있으며, 정오에는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생활을 한다. 일각에선 예술의 자유가 규제되고 상업화되고 있다는 걱정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예술은 베를린을 살아 숨 쉬게 한다.


베를린 내 예술가 보험에는 공식적으로 약 8,000명의 예술가가 가입되어 있다.

예술가 보험회사는 창작자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8,000명의 예술가가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임대료가 저렴한 편인 베를린에는 자유로운 예술 공간이 계속해서 마련되고 있고,

약 600여 곳의 갤러리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그중 대다수가 관장, 부유한 배우자의 재산이나

유산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최근 수년간 베를린의 모습을 대표하는 동시에 올해 뉴욕에서 열린

아트 페어 '아모리 쇼'에서 단여놐 돋보였던 '슈프뤼트 마거르스'나 '갤러리 쾨니히' 같은

일부 갤러리만 사업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수십 년간 성공적으로 예술 작품을 거래해온

'바바라 빈', '아우렐 샤이블러', 미하엘 슐츠', '폴커 딜', 같은 갤러리도 있다.

또 '갤러리 젝사우어', '갤러리 크바르라트', 디트리히 & 슐레히트림' 등 아직 자리를 잡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매우 흥미로운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소규모 신진 갤러리도 있다.


가끔 우리는 베를린의 모든 사람이 예술가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베를린의 많은 갤러리 오프닝 쇼는 맥주나 와인을 즐기는 남녀노소로 붐빈다.

모두가 취향과 의견이 있고 열정적으로 전시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예술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베를린에서는 예술을 판매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다.

예술가로서 삶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베를린에서 작품을 만들고, 그 외 다른지역의

갤러리에서 전시하거나 컬렉터에게 작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베를린은 예술가가 행사에 직접 기획할 때 최거의 역량을 발휘한다. 이곳에서는 전시를 열고

축하하고자 하는 의지와 정신이 넘쳐난다. 대표적 사례까 '응고롱고로'라는 그룹의 전시다.

화가 요나스 부르케르트가 소유한 커다란 스튜디오 단지에서는 약 160만 명의

예술가가 작품을 전시한다. 요나스 부르게르트는 바이센제 외각의 오래된 산업 복합 단지를

매입해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고 다른 예술가 친구들에게 남은 공간을 임대했다.

이곳에 입주한 7인의 예술가가 또 다른 이들을 초대해서 2016년 4월 말 최초로

'갤러리 위크엔드 베를린' 쇼를 개최했고, 그 행사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2018년에 다시

개최하게 되었다. 그 프로젝트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그들은 인쇄물과 그림을 한정판으로 제작해

컬렉터들에게 판매했고, 베르크하인과 마찬가지로 방문객은 이곳에 전시된 예술품을

보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섰다.


베를린은 도입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계속 변화하면서도 영속성을 지닌 도시다.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역사적·환경적·사회 문화적 배경으로 엮인 금빛 실들이 탄탄히 매듭을 이어 왔다.

이곳의 많은 예술가는 쾌락주의적이면서도 그들만의 충만한 라이프스타일을 열망하고 있다.

이들의 창의적인 사고와 자유롭고 능동적인 실천이 멈추지 않는 한 도시 베를린의 르네상스는

끊임없이 그 존재를 입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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